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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를 넘어 연대로, 〈드래곤 길들이기〉

예전에 애니메이션으로도 구현되었던 시나리오지만, 다시금 실사화된 영화를 보면서 정말 훌륭한 각본이라는 생각이 들어 몇 글자 남겨보고자 한다. 〈드래곤 길들이기〉는 생존의 절박함에 내몰린 사람들의 상황에서 시작한다. 하루가 멀다하고 식량들을 약탈해 가고 시설물을 파괴하는 드래곤들 때문에 주민들은 고통받는다. 특히, 족장인 스토이크는 아내가 드래곤들에게 끌려가 버렸기에, 분노가 더욱 뜨겁다. 주민들은 그들이 죽든, 드래곤이 죽든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는 마음에 드래곤 둥지를 찾는다. 마치 말벌을 퇴치할 때 말벌 통을 찾아내어 통째로 제거하듯 그들도 드래곤 둥지를 찾아내어 한 방에 드래곤을 소탕하고자 한다.

이것을 보면서 ‘혐오’의 논리가 떠올랐다. 우리 사회의 혐오는 기본적으로 ‘생존’을 향한 갈증과 갈망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인과 이슬람교도들을 향한 혐오는 그들이 우리 사회의 안정을 해치고 경제의 경쟁력 기반을 무너뜨린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여성에 대한 혐오도 여성이 남성의 사회 진출과 안정적인 가정생활에 감당할 수 없는 위협이 된다는 신념 때문에 생겨난다. ‘저들만 아니면 내가 훨씬 더 나은 상황에서 살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혐오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혐오의 보다 심층적인 근원은 ‘생존’이 아니라 ‘두려움’이다. 외계인을 다루는 온갖 헐리우드 영화에서 UFO를 처음 만난 인간들의 공통된 대응은 ‘공격’이다. 미지의 것, 내가 잘 파악 못하고 있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 대상을 인간은 본능적으로 두려워한다. H.P. 러브크래프트는 “인간이 느끼는 가장 강력하고 오래된 공포는,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라고 말한 바 있다. 스토이크가 드래곤을 어떻게든 ‘퇴치’하려고 하는 것은 그들의 생리와 사연을 모르기 때문이다. 잘 모르기 때문에 그들이 없어지면 나의 생활이 보다 윤택해질 것이라 어렴풋이 예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심리학적 표현을 빌리자면 ‘마법적 믿음’이다. 그들이 없어져서 오히려 더 상황이 나빠질 수도 있고, 그들과 협력하여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는데 그 가능성을 걷어차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스토이크는 왜 드래곤 둥지 소탕을 고집부리며 밀어붙였을까. 그런 판단을 내리기에는 드래곤에 대해 아는 것이 없고,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근원적 공포 즉, 코스믹 호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혐오를 뛰어넘어야 한다. 그것을 가능케 할 키워드가 영화 내에서 아주 극적으로 연출되는데, 아주 적절한 연출이었으며 통찰력 있는 각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처음부터 주인공이었던 히컵이 그물망에 붙잡혔던 드래곤 투슬리스를 죽여버렸으면, 이 영화가 결론으로 제시하는 드래곤과 인간의 공존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히컵이 투슬리스를 죽이지 못했기 때문에 이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영화 중간에 이에 대해 아스트리드가 묻는 장면이 나온다. “왜 그때 죽이지 못했어?” 이에 대한 히컵의 대답이 정석이자 정답이다. “투슬리스의 얼굴에서 내가 가진 두려움을 봤어. 그러니까 내 모습이 보였어.” 

내가 미워하고 혐오하던 대상에게 내가 요즘 하고 있는 걱정, 내가 어제 고민하던 불안이 똑같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마냥 혐오할 수 없다. 나와 똑같은 나약함이 있고, 주저하면서 나서지 못하는 의기소침함이 있다는 것을 공감한다면, 마냥 증오할 수 없다. 사실 나와 같은 처지라는 것을 공감할 때, 혐오가 설 자리가 없어진다. 공감과 연민이야말로 혐오의 치료제와 같다.

공감과 연민으로 혐오를 몰아낸 자리에 새싹처럼 피어나는 것은 ‘연대’다. 영화는 투슬리스가 꼬리지느러미(?)를 잃어버린 장애 드래곤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보여준다. 사람이 도와주지 않으면 투슬리스는 조그마한 분지도 벗어날 수 없고 사냥조차 할 수 없어, 곧 죽을 운명임을 몇 가지 장면을 통해 분명히 한다. 그리고 영화 말미에는 주인공인 히컵 또한 한 쪽 발을 잃은 장애인으로서 날아다니는 드래곤의 이동력이 아니면 어디 제대로 이동하기조차 어려운 신세임을 보여준다. 장애가 있는 드래곤과 인간이 서로 의지하며 더욱 강력한 힘을 내는 것. 이것이 바로 혐오의 논리를 반대하며,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삼는 목표다. 혐오가 ‘너를 제거하여 내가 더 편히 살겠다!’는 논리라면, ‘연대’는 ‘한없이 부족한 너와 내가 협력하여 0.5+0.5=3을 이룩하자!’는 논리인 것이다.

영화가 우리 사회에 좋은 메시지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포심에서 비롯되는 맹목적인 생존 논리가 ‘혐오’를 만들고 있다. 공감과 연민으로 이 혐오를 몰아내고 부족한 사람들끼리 연대할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되길 바란다. 꼬리 없는 드래곤과 다리 없는 사람이 협력하여 하늘을 나는 그런 사회가 되길, 정말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