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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가 세상을 구한다

방송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들었다. 한창 파업이 진행되던 때에, 파업을 주도하던 대다수의 구성원이 파업 참여에 주저하던 몇몇 직원들을 모질게 대하면서 생긴 파장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의 전개 과정은 ‘인지부조화’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지부조화 개념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사례는 ‘전향한 미군 포로’ 사례이다. 한국 전쟁 때 중국군에 포로로 붙잡힌 미군들은 공산당과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글을 쓸 것을 요구받았다. 포로들은 완강히 거부했지만, 중국군이 음식을 제공하지 않자, 배가 고파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기어코 적국의 체제를 찬양하는 글을 쓰고야 말았지만, 보상으로 주어진 음식은 고작 사탕 몇 개가 전부였다. 이때, 적극적인 ‘전향’이 이루어진다. 포로들은 자신이 사탕 몇 개를 받고자, 목숨 걸고 싸웠던 민주주의 가치를 배신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대신, ‘나는 원래 공산주의에 호감이 있었던 사람이다.’라며 적극적으로 자기합리화를 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자기 행동과 신념이 일치하지 않을 때, 발생하는 불쾌감을 ‘인지부조화’라고 한다. 이 인지부조화가 자기합리화와 여기에서 비롯되는 소위 ‘전향’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파업 때 모든 이가 파업에 참여할 여건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길 수도 있는 법이다. 그러나 이것이 곧 파업을 반대한다는 뜻은 아니다. 파업 현장에서 억눌리며 고통 속에서 투쟁하고 있을 ‘동지’들을 위해, 어떻게든 다른 방법들을 모색하며 연대하려고 마음을 쓸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날, 방송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들었던 사례 속에 등장하는 이 사람은 그렇게 연대하고자 나름의 방식으로 애쓰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파업 현장에 있는 대다수 직원들은 우리 편이냐, 아니냐의 잣대를 들이대며 그 사람을 모질게 몰아세웠다. 그리하여 결국 그 사람은 아예 사용자와 당시 정권의 정치 논리에 적극적으로 편승하는 사람으로 변했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것이 인지부조화에 따른 ‘전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뿐, 파업 현장의 동지들과 마음은 완전히 같았을 것이다. 처음에는 말이다. 그러나 동지라고 믿었던 직원들에게 변절자 취급을 받고 돌아갈 기회를 완전히 박탈당하게 되면, 어느 순간 믿게 된다. ‘사실 나는 평소에도 저들의 논리에 반감을 품고 있었어. 이제 그 반감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뿐이야.’라고 말이다. 그리하여 180도 완전히 정치 성향이 바뀌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도덕적 우월감에 취해서 타인을 단죄하면서, 우리 사이에 또하나의 배타적인 장벽이 생기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도덕적 우월감이 타인을 단죄하는 죄책감을 씻어주는 사이에, 누군가에게는 좌절감을 안겨주고 동시에 인지부조화를 촉발하게 되는 셈이다. 그런 알량한 우월감이 누군가를 집단 밖으로 쫓아버리는 일이, 그 회사에만 있었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막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했을까. 모질게 대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파업하는 직원들 입장에서 설사 온전히 전향한 변절자로 보인다 하더라도, 그렇게 벼랑 끝으로 몰아붙여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때로는 언급을 자제하고 평가를 유보하면서 언제든 돌아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줘야 했다. 그것이 바로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자비의 실천이다. 우리는 그분이 끝까지 기다려주시는 분이라고 신앙으로 고백한다. 우리 또한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다. 아무리 내 시선에서는 악인이 분명하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단죄하는 순간, 그는 진짜로 악을 향해 ‘전향’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기다려주고 인내하는 것 자체가 악을 향한 전향을 막고, 돌아올 여지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가면 갈수록 진영 논리가 거세지고 있고, 이와 더불어 혐오의 논리가 강성해지고 있는데, 그런 배타적인 피아 식별이 수많은 전향자를 양산하는 독이라고 확신한다. 우리 시대의 답은 여전히 단 한 마리 양을 찾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는 그 분의 말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