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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장미의 미학, 소설 〈침묵〉

중고등학교 다닐 때 문학의 미적 범주에 대해 배웠던 기억이 난다. 객체/대상이 어떠한가, 주체/주관이 어떠한가. 이 두 가지 조건에 따라 총 네 가지의 미적 범주가 발생하는데, 우아미, 숭고미, 비장미, 골계미가 그것이다. 그중에 일본 문화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것이 비장미다. ‘시적 화자의 의지가 외부 세계에 의해 좌절될 때 나타나는 미적 느낌’이 비장미라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외부 환경이 너무나도 압도적이기 때문에 그 앞에서 개별 인간이 자신의 왜소함을 극도로 느끼며 표현하는 문학적 아름다움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사실 일본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이해할 수 없었던 것, 아니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넘어 거부감마저 들었던 것 중 하나는 주인공들의 끝도 없는 비명이었다. 적에게 공격을 당하거나, 아니면 그러기도 전에 살인마가 나타나기만 하더라도 일본의 주인공은 목청이 찢어져라 소리를 지른다. 일본 특유의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으아아아아아아아~’ 하고 남녀노소 주인공이 끝도 없이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는 장면만 길게, 그리고 자주 보여주는 연출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주인공이 얼마나 괴로워 하는지 보여주기 위한 장치라고 백번 양보한다고 하더라도, 한 번 보여주는 것으로도 족할 것 같은데, 무슨 배경 음악 틀어놓은 것 마냥 수차례 반복되다 보면 거부감에 영화, 애니 자체를 보기가 어려워지곤 했다.


그러다 그 원인불명의 비명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된 계기가 바로 ‘비장미’였다. 지진이나 쓰나미와 같은 거대한 자연재해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끊임없이 확인해야 했던 일본의 역사 때문에, 일본 문화의 저변에 깔려 있는 기본적인 미학은 ‘비장미’일 수밖에 없다는 설명을 어디선가 들었다. 자연재해는 어떠한 이유도 없다. 악인이나 선인을 골라서 덮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주기가 있는 것도 아니며, 전조가 뚜렷하게 있는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어떠한 이유도 없이 덮쳐들어 모든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것이 자연재해다. 그래서 첫 번째로, 일본인들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무력한 개별 인간을 압도한다고 인지한다. 두 번째로, 그 환경이 인간에게 영향을 미칠 때에는 이유와 목적을 찾는 그 어떤 행위도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내가 읽었던 ‘비장미로 보는 일본’에 대한 설명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일본 드라마나 영화는 갑자기 외부에서 어떤 절대자가 등장하는 것으로 시작할 때가 많다. 〈간츠〉처럼 갑자기 검은 구체가 등장하여 사람들을 학살하는 것으로 영화가 시작한다. 저 구체가 ‘정확히 무엇이며, 왜 등장했는가.’와 같은 질문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무력하며, 그 무력함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코끼리 앞에서 어떻게든 살길을 찾아 땅굴로 숨어드는 개미처럼 살길을 찾아내는 인간들의 각자도생을 보여줄 뿐이다. 영화 〈배틀로얄〉도 마찬가지로 왜 갑자기 급우들끼리 서로 죽여야 하는지 이유를 찾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저 소리 지르며 죽어가는 개별 인간의 무력함을 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아리스 인 보더랜드〉의 갑자기 각 단계의 통과를 요구하고 통과에 실패한 인간들은 그 자리에서 숙청된다는 요상한 설정이 이해된다. 실상, 일본인들에게는 갑자기 마을을 덮쳐오는 저 쓰나미의 절대적인 위세를 바라보며 좌절하던 그 마음이 〈간츠〉, 〈배틀로얄〉, 〈아리스 인 보더랜드〉의 주인공의 마음과 같았던 것이다.

〈침묵〉을 보는 내내, 비장미 생각이 났다. 그리스도교에서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나서 보시니 좋았다고 하셨던 이 세상에 왜 악이 창궐하는가.’라는 질문은 오래된 고민 중 하나였다. 선인이 이유 없이 고통받아야 하는 상황이 왜 생기느냐는 외침은 사실 성서에도 이미 반영되어 있어, 욥의 외침을 보면서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의 의미에 대해 질문하곤 했다.


그런데 같은 질문이 〈침묵〉 안에서는 더욱 절절하게 울려 퍼진다. 저 강대한 권력의 위세 앞에서, 소설에서 늪과 같다고 표현했던 일본의 깊은 토속적 전통문화 안에서, 개별 선교사의 의지는 너무나도 무력해 보인다는 것을 작가는 지속적으로 강조하여 표현한다. 내가 배교하지 않으면 저 구덩이에 매달린 죄 없는 교우가 대신 죽어야 한다는 아이러니가 소설에서는 개별 선교사의 무력함과 왜소함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로 제시된다. 아마 한국 소설 같았으면 교우를 대신하여 ‘내가 죽겠다, 내가 희생하겠다.’고 나서는 선교사의 의지를 높게 사는 방향으로 소설이 전개됐겠으나, 일본 소설이기에 그사이에 숨어있는 ‘비장미’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것이 인간의 본질 중 하나이다. 순교자와 선교사의 숭고한 의지를 강조하며 그들의 거룩한 모범을 본받아야 한다고 외치면서 우리가 놓쳤던 가장 중요한 본질 중 하나다. 하느님 앞에서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하느님까지 갈 것도 없이, 심지어 인간 스스로 만든 제도와 문화 앞에서조차 인간은 너무나도 무력하다. 사람은 그 절대적인 무력함을 인식하면서 그제서야 창조주가 절대자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질문한다. 구덩이에서 아무런 응답이 없는 신을 바라보며, 절대신의 의미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질문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저자인 엔도 슈사쿠는 소설 제목인 〈침묵〉에 대해, 그것을 하느님의 침묵으로 해석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인터뷰한 적이 있다. 배교한 사람을 기록에서 지우고 순교자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교회의 ‘침묵’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 의도라는 것이다. 그 인터뷰는 교회가 부당하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개별 순교자의 영웅적 면모에 대해 강조하고 집중하다보면, 순교자가 아니라 순교자 할아버지라 하더라도 하느님 앞에 작을 수밖에 없는 먼지 같은 인간이라는 또하나의 본질을 잊기 쉽다는 엄중한 통찰을 담은 것이리라. 그렇게, 소설 〈침묵〉의 중요한 가치 중 하나는 비장미의 발견인 것이다.


인간이 이제 하느님을 찾는다. 무력한 인간이 하느님께 의지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쓰나미와 지진과 화산으로 한순간에 가족이 죽고 도시가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 자신의 무력함에 절망했던 일본인들이 오랫동안 찾고자 했으나 찾지 못했던 답. ‘신은 왜 침묵하는가.’ 하는 질문이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탐구된다. 어쩌면 그토록 하느님께 가장 매달렸던 신앙인들이 가장 많았던 나가사키, 그중에서도 하필이면 주교좌 대성당 바로 상공 위에서 핵폭탄이 터졌고, 하필이면 판공성사로 가장 많은 교우들이 성당에 모여있던 날 그 폭탄이 터졌다는 사실 앞에서도 그들은 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을까? 소설에서 일본 문화는 늪과 같아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뿌리내릴 수 없는 곳이라는 영주의 조소가 나오지만, 사실 일본이야말로 가장 근원적인 종교적 질문 앞에 단련되어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고통받기 위해 존재한다.’ 사실은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배교하고 성화를 밟는 교우들과 함께 고통받고 있었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주인공의 입을 통해 신앙 고백 되는 모습은 숙연하다. 그것이 우리가 찾던 절대자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렇게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나도 푸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