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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란 무엇인가? – 연대 없는 사회의 위험

최근 두 건의 외국 사고 사례를 살펴보게 되었다. 그 둘을 비교하면서 돌이켜 보게 된 사회적 연대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나눠볼까 한다.

첫 번째 사고는 23년 미국에서 발생한 심해 관광용 잠수정의 침몰 사고다. 오션 게이트 익스페디션이라는 회사에서 심해를 잠수하는 잠수정에 일반 관광객을 태우고 1912년 침몰한 타이타닉호의 잔해를 구경하러 가는 관광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문제는 이 잠수정에 설계 결함이 너무 많았다는 것이다. 심해의 높은 압력을 견디기 위해서는 전 방향에서 압력을 균일하게 받아낼 수 있는 구(球)형으로 기체를 만드는 것이 보통인데, 이 잠수정은 관광객을 여럿 태우기 위해 원통형으로 제작됐다. 관광을 위해 창문도 너무 넓게 만들었으며, 좌석 설치를 위해 강도가 떨어지는 탄소섬유도 사용했다. 23년 6월, 관광객 5명을 태우고 심해로 내려갔던 이 회사의 타이탄 호는 잠수를 시작한 지 1시간 반 만에 처참하게 찌그러졌고, 승무원을 포함한 탑승객 전원이 즉사했다.

언론은 잠수정의 설계에 문제가 많았다는 것뿐만 아니라, 회사 대표의 운영 마인드가 아마추어적이었음을 지적했다. 내부에는 심해 잠수정용이 아니라, 야외 캠핑용으로 판매되는 부품이 설치된 곳도 있었고, 심지어 잠수정의 운항은 PC용 게임패드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대표는 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자랑하며 방송용 비디오 녹화 중 자랑할 정도였다.

설계도 비정상적으로 했고, 운용도 아마추어적으로 하다가 인명사고를 냈으니, 대표를 맹비난할 법도 한데, 놀랍게도 미국 사회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인터뷰하는 사람들은 대표에 대해 “좋은 사람이었다.”라고 평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주변 사람 뿐만 아니라 전문가들도 인터뷰 중, 그 개인의 무모함을 비난하는 대신, 그 무모함을 통제할 수 있는 사회적 제도의 미비함을 지적했다. 심해 잠수정이 규격 외로 분류되어 통제 대상이 아니었다는 점, 공해상에 잠수할 경우 통제할 규정을 따로 만들어놓지 않았다는 점 등을 들며, 개인의 모험심이 위험 수위에 넘나들 경우, 이를 제지하고 안전 영역 안으로 회귀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통제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매우 매우 인상적이었다. 충격적인 사고가 발생했을 때, 이 여파를 쉽게 떨쳐내는 방법은 공동체 외부에서 원인을 찾아내 모든 책임을 그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한 사람을 지목하여 비난을 퍼부으며, 그 사람에게 문제 발생의 원인과 사건 해결의 대책 요구를 전부 요구한다. 그렇게 한 개인의 일탈로 몰아붙임으로써 비극적인 사고를 당한 충격을 희석하는 것이다.

그런 식의 충격에 대한 외면과 회피가 이루어진 대표적인 사례가 두 번째로 살펴볼 사고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항공기 사고라고 불리는 일본 JAL123편 추락사고가 그것인데, 이 사고는 흔하지는 않지만, 종종 일어나는 테일 스트라이크에서부터 비롯되었다. JAL123 편 비행기는 사고가 발생하기 7년 전 홍콩에서 착륙하다가, 비행기 끝부분이 바닥에 접촉하는 테일 스트라이크가 발생한 바 있었다. 비행기 꼬리 부분에 비행기 내부가 들여다보일 정도의 균열이 생겨났다.

일본항공은 사건 발생 직후, 비행기 제조사인 보잉에 사고 기체를 맡기고 수리를 의뢰했다. 여객기 회사의 자체 수리 인력보다 월등히 뛰어난 제조사의 수리 실력과 비행기 구조 이해도를 감안한 당연한 조치였다. 그런데 보잉의 수리 담당자가 매뉴얼을 무시하고 자의적인 판단에 따른 수리를 하면서 기체 내구도가 대폭 하락한 채로 수리가 마무리되고, 그대로 일본항공에 기체가 인도된다.

일본항공은 아무것도 몰랐고, 일본항공의 점검 담당자는 정상적으로 기체를 인도받았다는 서류에 서명했다. 그리고 7년 간은 아무 문제 없이 운항했으나, 85년 8월 문제가 터진다. 조악하게 수리했던 비행기 꼬리 부분이 폭발하면서 비행기 각 날개 부분을 통제하는 유압 계통 부품에 함께 문제가 생겼고, 이로 인해 비행기 조종사가 비행기 전체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결국 비행기는 산 중턱에 정면충돌했고, 승무원을 포함한 탑승객 524명 중 520명이 사망했다.

 내가 주목했던 부분은 사건 발생 이후 일본 사회의 대응 방향이었다. 일본항공은 수리를 담당했던 보잉사에 소송을 제기하고 보상을 요구하려 했으나, 일본 사회는 일본항공이 책임을 전가한다며 일본항공을 비난했다. 일본항공도 기체를 돌려받은 후 수리가 정상적으로 됐는지 꼼꼼히 확인할 의무가 있었으므로, 완전히 책임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사회는 희생양을 원했다. 만악의 근원 취급을 하면서 분노와 상실감을 쏟아부을 대상이 필요했다. 결국 일본항공이 모든 책임을 지고 유가족에게 보상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7년 전에 테일 스트라이크를 일으켰던 조종사와 비행기 인도 서류에 서명했던 점검 담당자는 둘 다 자살했다.

미국에서 잠수정 사고가 발생했을 때, 사람들은 잠수정을 잘못 설계하고 잘못 운용했던 대표를 비난하지 않았다. 그 대표의 방임된 모험심을 통제할 수 있는 사회적 제도와 장치의 부재를 비난했다. 각 개인은 충분히 일탈할 수 있지만, 일탈하는 개인이 위험 수위로 넘어가지 않도록 제재하는 것이 사회적 안전망의 역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회의 존재 이유가 그것이다. 각 개인의 부족함이 개개인의 몰락과 멸망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보완하기 위해, 사회와 공동체가 존재한다. 사회의 원활한 구동을 위해 개개인이 부속품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이 존엄성의 보장 속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보조하기 위해 사회가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은 처음부터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전대에서 쌓아온 지혜와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공동체 내에서의 교육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고, 성장하고 나서도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인 사회적 연대 속에서 사람은 삶의 의미를 찾는다. 인간은 그렇게 창조되었다. 그래서 교회가 공동체인 사회의 구동 원리는 ‘공동선’이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가 병들어 개개인을 부족함을 보조할 수 있는 기능을 상실하게 되면, 그저 보조가 필요할 뿐인 사회 구성원을 병자 취급하며 짐짝처럼 대할 때가 있다. 사회 내부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했던 일본 사회의 전체주의적 한계를 보면서 그것을 절감한다.

일본 사회는 ‘민폐’를 끼치는 것을 대단히 문제시한다고 들었다. ‘이치니마에’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1인분의 음식’을 뜻하는 말로 한 사람의 구실을 다하는 어른을 뜻한다. 그런데 이 말 뒤에는 1인분 이하의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멸시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 1인분도 못 하는 사람을 사회가 품어주고 이끌어줘야 한다는 생각 대신, ‘민폐’를 끼친다며 눈총을 주는 분위기가 ‘이치니마에’라는 말 속에 숨어 있다. 문제를 일으킨 사람의 사례를 통해 제도적 한계를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에게 자결을 강요하는 사회. 그것이 일본 사회다.

과연 한국 사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질문해 본다. 잠수정 사고를 대했던 미국 사회의 시선인가, 아니면 일본 사회의 시선인가. 우리 사회에서 여론의 마녀사냥이 심해지는 것을 보며 심히 걱정된다. 유튜버들이 마녀사냥으로 소위 ‘나락’에 가는 경우가 정말 많아졌다. 온 국민이 매달려 사람 하나의 도덕성을 놓고 왈가왈부하며, 비난을 퍼붓는 일이 많아졌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연예인들도 여럿 있었지만 이같은 흐름을 뒤집지 못했다. 일탈하는 개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점점 안쓰러움에서 매서운 엄격함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는 증거와 같다.

코로나 이후, 사회 공동체에 민폐를 끼치는 것에 더더욱 예민해지고 있다. 특정 집단의 민폐로 국가에 위기가 왔었다는 경험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심히 우려된다. 가톨릭교회교리서에 ‘구원은 개인이 노력하여 해당 개인이 구원받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구원은 공동체 단위로 이루어진다.’는 내용이 있다. 선행을 베풀면 선행을 받는 사람과 베푼 사람이 함께 구원된다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이 이루는 공동체의 본질적 속성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다고 믿는다. 과연, 우리는 인간다운 공동체를 향해 가고 있는가? 우리가 가는 길은 옳은 길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