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유튜브에서 흥미로운 영상 하나를 봤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권에서 이제는 아시아인들을 두 분류로 나눠서 본다는 내용이었다. 팬시 아시안과 정글 아시안. 이렇게 둘인데 팬시 아시안은 얼굴도 하얗고 키도 크고 훨씬 서구 백인과 비슷한 외모를 가져 서구인들도 흠망의 대상으로 삼는 아시안을 말한댄다. 반면, 정글 아시안은 키도 작고 까무잡잡하여 못 살고 미개한(!) 아시아인들을 지칭한다는 내용이었다. 팬시 아시안에 속하는 나라는 한국이 대표적인데, 근래 들어 베트남인들이 자기들은 다른 동남아 국가들과 달리 팬시 아시안에 속한다는 주장을 펼쳐 가소롭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영상을 보는 순간, 조금 소름 끼치게도 1940년대 일본의 ‘탈아입구’가 생각났다. 일본인은 이제 아시아인이 아니라 서구 유럽인이라는 주장. 그것은 끈적하게 흐르는 동양인 콤플렉스라는 열등감을 반영하는 표현이었다. 한동안 일본에서는 유전상 일본인은 유럽에 가깝다는 둥, 중국·한국이 아니라 유럽을 통해서 문물을 전수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둥, 일본어는 언어학적으로 유럽 언어에 가깝다는 둥 가당치도 않은 주장들을 담은 책들이 90년대까지도 계속 쏟아져나왔다. ‘탈아입구’라는 말은 태평양전쟁 중에 나왔던 제국주의의 구호였지만, 그 밑바닥에 깔려있던 열등감은 90년대 일본 경제의 황금기를 통과하는 와중에 더욱 기승을 부리며 서점가를 통해 일본인들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던 것이다.
이제 그 열등감이 우리에게 바통을 넘기는 것은 아닌가 싶어 걱정된다. 한국인은 뭘 해도 안 된다는 식의 자괴감이 퍼진 때가 없지 않았고, 그것이 일본 제국주의 교육의 잔재라는 지적을 본 적도 있었다. 마지막 일본 총통이 떠나면서 “한국인들의 사상 안에 심어놓은 자기 비하의 교육은 몇십 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나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뭐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괴담(?)을 본 적이 있는데, 그게 사실 한국식 자괴감에 대한 자기분석 결과와 같았다. 그러나 경제발전과 더불어 서서히 회복된 민족적 자신감은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쓰면서 광화문에 펼쳐진 어마어마한 붉은 물결을 서로가 시각적으로 확인하며 충만해졌다. 그리고 최근 K컬쳐가 전 세계를 휩쓰면서, 한국의 자신감은 이제 자괴감의 단계를 온전히 벗어나 충만함의 수준에 도달했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충만함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함이 있고, 밑바닥에 깔려있는 자기 비하를 온전히 떨쳐내지 못했다는 증거가 보인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나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다른 집단을 비하하며 나의 성취도와 성과를 상대적으로 확인하려는 성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 삶에서 뒷담화가 뿌리뽑히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지 않은가. 일본이 탈아입구를 외치면서, 한국인 2등급, 대만인 3등급 하는 식으로 인종 순위를 매겨 정책적 차별을 했었던 것도, ‘그래도 우리가 너희보단 유럽에 좀 더 가깝지.’라는 조바심을 해소하려는 몸부림이었다고 생각한다.
남미의 아시아인 비하도 이와 맥을 같이한다. 남미의 지도층은 유럽 이주민의 후손이다. 칠레와 아르헨티나 등 남미 부국이 유럽에서 독립을 할 때, 독립전쟁을 주도했던 이들은 이 유럽 이주민의 후손인 크리오요였다. 이들이 유럽 출신 쌩(?) 백인에 비해 차별 대우를 받았던 것에 불만을 품고 기득권을 쟁탈하기 위해 벌인 투쟁이 독립전쟁으로 번졌던 것이다. 이를 대체하기 위해 ‘남미인’이라는 정체성을 내세우는 대신, 이들은 유럽 출신 백인보다 자신들이 더 유럽인이라는 자각으로 무장했다. 가령, 칠레가 독립하며 내세운 모토는 ‘유럽보다 더 유럽 같은 국가’였다. 아직도 자신들을 유럽인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 족보에 독일계가 한 명 있으면, ‘우리 가족은 독일인’이라고 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고 들었다. 이것이 남미 대륙 전체에 퍼져있는 열등감과 자괴감이 표피로 솟아난 증거와 같다. 이런 종류의 열등감 때문에 그들이 특히 눈을 양쪽으로 찢으며 아시아인들을 비하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일본인이 탈아입구를 외치며 한국인은 2등급, 대만인은 3등급이라고 외쳤던 것과 완전히 동일한 표현 방식인 셈이다.
팬시 아시안, 정글 아시안으로 아시아인들을 나누고 한국인은 팬시 아시안에 속한다고 주장하는 그 영상이 우려스러웠던 것도 그와 같은 이유였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 쇼츠 영상에서는 1885년 영국이 거문도 점령 사건을 벌였던 것도, 사실 영국 군인들은 아시아에 진출했다던 유다인들의 후손을 찾는 중이었는데, 까무잡잡한 중국 일본인들과 달리 하얗고 키가 큰 조선인들을 보고 이들이 바로 그 사람들이라는 확신을 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개화(!)되지 못한 상태인 것을 보고, 왕족의 유해를 볼모 삼아 개화를 요구하기 위해 벌인 사건이 거문도 점령 사건…. 이라고 주장하는 영상이었다. 기가 막혔다. 한국식 탈아입구가 여기저기서 폭주하는구나 싶다.
나 자신의 우월감을 확인하고 싶어, 어떻게든 타인의 상대적 우열을 주장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유혹’이다. 2010년대 후반에, 아마 조선일보였던 것 같은데, 테북 테남의 구분에 대한 기사가 난 것을 봤다. 다 같은 강남인 것 같지만, 사실은 강남도 다시 두 부류로 나눠서 테북, 테남으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테헤란로 이북, 테헤란로 이남을 지칭하는 표현인데, 테북은 전통적 부유층 지역이라 쌓아놓은 부가 제공하는 안정감이 커서 자식 교육에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으며 차라리 유학을 선호하고 여유가 넘친다는 것이다. 반면, 테남은 근래 들어 얻은 상대적으로 작은 부에 기대고 있기 때문에 자식 교육에 열을 올린다는 뭐 그런 기사였다.
기사를 보면서, 저 기사는 소위 테북에 사는 기득권들의 시각을 반영한 기사가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울타리를 치고 타인을 밀어내야 나의 기득권이 더 선명해지는 이들의 욕망이 반영된 것이 틀림없다 싶었다. 사람은 너와 나 사이의 차이를 쉽게 발견한다. 다름을 찾아내는 건 쉽다. 하지만 다름은 같음에 비해 훨씬 사소한 것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확신한다. 테북 테남의 차이보다는 강남으로서 공유하는 공통점이 훨씬 많다는 것이다. 강남 강북도 그렇게 다르다고 하지만, 사실은 서울 시민으로 공유하는 공통점이 훨씬 많을 것이다. 수도권 지방도 마찬가지라서 한국인으로서 공유하는 공통점이 더 많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그 공통점을 발견하고 하나 되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물로 작용하는 것이 바로, 열등감이다. 그 사소한 차이점에서 드러나는 작은 우월감에 취하도록 부추기는 범인이다. 이것을 극복해야 하나 되는 기쁨이 훨씬 크다는 것을 감격적으로 느낄 수 있다. 한국식 탈아입구에 도취되지 않길 간절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