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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현재화를 말하다, 〈그리스도의 탄생〉

얼마 전에 XXXX 연수에서 봉헌하는 미사에 다녀왔다. 연수의 일원으로 참가한 지 1년은 넘은 시점에 이루어진 정말 오랜만의 방문이었다. 너무 일찍 갔는지 한참 동안 기다리다가, ‘좀 늦장 부리면서 천천히 올 걸…’ 하는 생각이 들 무렵, 문득 고개를 든 내 시선 안으로 연수 지도 신부님이 서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어두운 조명 아래였기에 실루엣만 시커멓게 보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짧은 사이에, 내가 지도하던 때가 생각났다. 같은 프로그램이 진행되던 바로 그 때, 지도 신부님이 지금 서 계신 바로 저 자리에 1여 년 전에 내가 서서 머릿속으로 하고 있던 온갖 생각들이 떠올랐다. ‘다음 순서가 뭐였더라.’부터 시작해서, ‘다들 심드렁한 반응이면 어떡하지.’에 이르기까지, 그때 손끝에서 올라왔던 약간의 긴장감과 흥분마저 기억과 함께 떠올랐다. 그건 마치 시냇물이 너무 맑아, 바닥에 진흙이 가라앉아 있다는 것조차 완전히 잃어버린 순간, 미꾸라지 한 마리 덕분에 흙탕물로 범벅이 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듯한 생경함이었다. 잊고 있는 것을 넘어, 심지어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나 있었는지조차 아련했던 기억의 상실에 대한 반동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내가 지도할 때와는 전혀 다른 시간에, 전혀 다른 구성원들이 그들만의 연수를 만들어 나가는 중이었지만, 그 순간 나는 내가 지도하던 연수의 한가운데 와 있는듯한 감동을 느꼈다. 시간이 다르고, 사람이 다르더라도, 교회의 전통 안에서 성령께서 같은 감동과 기쁨을 선사하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그 순간, 나와 함께하셨던 성령의 역사하심이 바로 이 순간 반복되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뒤집어서 이야기하자면, 앞선 수많은 선배가 느꼈던 바로 그 감동을 나도 똑같이 느꼈던 것임을 새삼스럽게 확인한 것이기도 했다.

교회는 오랫동안 최후의 만찬과 십자가상 죽음으로 완성된 미사를 같은 논리로 설명해 왔다. 즉, 최후의 만찬과 십자가상 죽음은 단 한 번이었지만, 우리의 기억 안에서 해당 사건들은 ‘현재화’된다는 것이다. 다시는 경험할 수 없는 지나간 사건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명령으로 제정된 ‘미사’라는 신적 행위를 통해, 그 마지막 식사 때, 그리고 십자가상 죽음이 이루어지던 바로 그 순간이, 지금 우리 사이에서도 펼쳐진다는 설명이다.

학교 다닐 때, 이를 묘사하는 예민한 문법을 아우르는 신학적 표현을 배웠던 기억이 난다. 가령, ‘재현’이라는 표현을 써서는 안 된다. 최후의 만찬과 십자가상 사건 자체가 여러 번 반복된다는 뉘앙스를 풍겨서는 안 된다. 단 한 번의 사건이 ‘현재화’된다고 설명해야 한다. 등등. 그러나 강렬한 체험은 정교한 논리로 무장된 신학적 모델의 우아함을 뛰어넘는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누군가의 체험을 근간으로 삼아, 언어로 제련한 것이기 때문이다.

엔도 슈샤쿠의 〈그리스도의 탄생〉을 읽고 있다. 〈그리스도의 생애〉와 함께 세트를 이루는 책이다. 저자는 성경이 제자들의 신앙 체험에서 비롯된 신앙 고백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에 집중한다. 온전한 초대 교회의 저작물이라고 보는 한쪽 끝과, 온전한 사실을 저술한 보도문과 같다고 보는 또 다른 한쪽 끝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저자는 나름의 모델을 세운다. 성경에는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 않지만, 성경 고유의 저술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제자들의 사정을 추리하여 그들의 체험을 상상하여 채워 넣는 것이다. 그 상상의 꼬리 끝을 따라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 상상이 합리적이냐, 교도권의 범주 안에 있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결국, 모든 교의와 성경은 강렬한 하느님 체험 그 자체에서 비롯된다는 설명이, 잠자고 있던 신앙을 일깨운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마치 그날 미사에서 겪은 체험이 미꾸라지 한 마리처럼 잠자고 있던 감동을 일깨웠던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