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보관물: 온갖 사견

젊은 보수를 향한 진단. 그들에게 전할 사과문이 필요하다

내가 20대일 때, 투표를 하면 항상 압도적인 표차로 내가 지지했던 후보가 떨어지는 모습을 티비로 지켜봐야 했던 기억이 난다. 그것은 암담한 현실이었다. 경상도 지역의 인구가 많기 때문에 진보의 지지세가 약한 문제는 본질적으로 해소될 수 없다는 절망적인 진단도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다. 매 선거 때마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 것을 답답해했지만, 단 하나의 돌파구가 어렴풋이 보였으니, 그것은 보수 성향이 강한 60대 이상이 돌아가실 때가 되면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였다.

과연 그 예측은 틀리지 않아서, 내가 40대가 되니 이제는 40~50대의 진보 세력이 인구수로 보수를 압도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데 하나 틀린 것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세상은 점점 진보로 기울 줄 알았으나 그렇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치고 올라오는 바로 밑 세대가 놀랍도록 보수적이었다. 특히 남성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진보로 기울 줄 알았던 우리 사회는 이제 보수화라는 대세 속에 간신히 진보의 수적 우위를 잠시 누리고 있는 긴장 속에 놓여 있다.

한 세대 아래 청년들은 왜 보수화됐을까? 우리 세대는 그것을 교육 탓으로 돌렸다.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기 때문에. 70~80년대 민주화 투쟁의 가치와 수구 세력의 악랄함을 잘 모르기 때문에. 한마디로 그들에게 어떤 문제가 있기 때문에 발생한 결함이라고 취급했다. 결함을 수정해 주면 해결될 어떤 문제라고 취급했다. 

그런 안일한 생각이 일찍이 보지 못한 ‘기운 넘치는 팔팔한 가스통 할배’를 만들어 냈다. 남성연대였나. 신흥 남성 우위 보수 세력을 이끄는 어느 젊은 대표는 수시로 웃통을 벗어제끼며 남성성을 과시한다. 몸짱이라고 자랑하고 다녔던 어떤 요리 유튜버를 한방에 때려눕혔다는 쟁쟁한 무력을 전하는 시정담이 한동안 뉴스에서 화재였다. 그의 인스타에는 잘 만든 근육을 자랑하는 포스팅이 꽤 여러 개 있다. 그뿐만 아니다. 문 전 대통령 양산의 자택 앞에서 대형 스피커로 욕을 퍼부으며 난리를 쳤던 어느 보수 논객도, 항상 옷을 벗고 운동으로 다져진 몸을 보이곤 했다. 그들은 그런 퍼포먼스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온몸으로 던진다. 그들이 구시대의 보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로 생겨난 새로운 신진 세력이라는 선언 말이다. 그들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미지의 영역으로 진입하는 중인 셈이다.

그들에게는 문제나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이었다. 왜 그런 말을 하고 싶어졌을까. 그것은 결국 우리 사회가 단군 이래 최전성기를 지나고 있다는 아이러니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아니 단군 할아버지 이래 부모보다 못사는 자녀는 없었다. 특히 현대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래, 거의 모든 자녀가 부모보다 월등히 잘 살았다. 사회는 팽창하는 중이었고, 제 아무리 유리 천장이라고 해도 그 유리 천장의 천고가 계속 높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불만을 희석할 수 있었다. 집값은 계속 올랐지만, 부모보다 훨씬 잘살게 된 젊은 세대는 집을 어떻게든 샀다. 젊을 때 저렴한 가격에 집을 샀던 부모 세대가 늙어서 집을 팔면 노후 대비가 됐다. 말하자면 자녀 세대에게 폭탄 돌리기를 하면서 노후 대비를 했던 것이지만, 자녀들이 훨씬 부자였기 때문에 그 구조적 모순이 힘으로 극복이 됐던 것이다.

그러나 한민족 최고의 전성기에 도달했다. 뒤집어서 말하자면, 이제 우리 사회가 내려갈 때가 됐다는 말이다. 새로운 세대는 이제 건국 이래 최초로 부모보다 못사는 세대가 될 운명이다. 높아진 집값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됐고, 돈이 없어서 결혼을 못 한다는 3포, 4포가 이젠 위협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다. 3포, 4포라는 말은 이러다 진짜 저것 때문에 결혼 못 하는 거 아냐 하는 우려 때문에 나온 말이었는데, 이젠 누구나 맞닥뜨려야 하는 냉엄한 현실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당연하다. 이 모든 문제가 기성세대, 특히 현시대의 이념적 주도권을 잡고 있는 40~50대의 문제로 보일 것이다. 우리가 새로 꺼냈던 모든 어젠다들이 자기들을 구렁텅이에 밀어 넣은 원인처럼 보일 것이다. 남녀평등, 이념적 평등 등이 나아갈 방향을 잘못 정해 배가 좌초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처럼 보이는 것도 그들 입장에서는 당연할 수 있다. 요즘 젊은 세대가 소위 PC,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진절머리 치며 거부 반응을 보이는 것도, 그것이 우리 세대가 추구했던 방향 중 하나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마디로, 몰락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미래라는 배에 올라탄 그들의 좌절감이 이 모든 갈등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과연 우리 세대의 책임은 없는가? 과연 초등학생 때부터 학원을 몇 개를 다녀야 하고, 이제는 7세 고시까지 봐야 하는 이런 사회가 만들어진 데에 우리 세대의 책임은 하나도 없는가? 당연히 있다.

하지만, 우리 세대는 그에 대해 절대로 책임을 지려고 한 적이 없다. 미안하다고 한 적이 없다. 그들이 보수로 기울며 격렬히 울분을 통할 때 우리는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다. 수능이 끝날 때마다, 그 어떤 지도자도 수능 같은 제도에 여러분을 옳아매 고통스럽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다. 이제는 즐기라는 둥, 이제는 해방이라는 둥 은근히 ‘나에게는 문제가 없다.’는 신호만 보냈을 뿐이다. 힘들어 하는 청년 세대의 방황에 ‘쫄지 말라’는 것은 사실 답으로서 부족하다. 쫄아든 그들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을 쫄게 만든 우리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이 곧 고갈되기에 청년들이 더 많이 부담해야 할 것 같은데, 노인 세대 중 소액만 부었는데도 몇십 배씩 수령해 간다는 소식이 얼마 전에 뉴스에 나왔다. 예상대로 젊은 세대들에게 분노의 트리거가 되어 난리가 났다. 과연, 우리 세대 중 누가 미안하다고 그들에게 이야기했을까? 아무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없다. 우리 사회를 이렇게 끌고 와서 미안하다, 이런 세상을 물려줘서 미안하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울까. 오늘도 이민자들 다 때려죽여야 한다고 날뛰는 온라인 게시판을 보면서, 그들의 분노에 고개가 숙여진다. 미안하다고 말할 줄 몰라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한국전쟁 중에 산중에 있는 마을은 한밤중에 방 안에 들어오는 군인들이 가장 공포스러웠다고 한다. 그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눈에 후레시를 직접 비추어 그들을 알아보지 못하게 한 후 묻는다. “어느 편이야?”

이 질문에 잘못 대답하면 온가족이 몰살 당한다. 국군에게 ‘공산당 편이에요.’라고 해서는 안되는 것이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념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산중의 가난한 민중에게 목숨을 건 선택은 너무 가혹하다. 그렇다고 “우리는 그런 거 잘 몰라요. 어느 편도 아니에요.” 하는 식의 영구중립 선언은 통하지 않는다.

오로지 50% 확률로 온가족의 목숨을 거는 러시안 룰렛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매일밤 벌어진다. 아군에 설 것인지 적군이 될 것인지 선택을 강요하는 폭력이 한국전쟁의 핵심이다. 한국전쟁이 그 당시를 살던 온국민의 무의식에 트라우마로 박아넣은 병폐다. 이념이란 스펙트럼 같은 것이어서 수많은 중간치를 갖기 마련인 것이나, 어느새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전쟁 현장의 재현이 되었다.

요즘 탄핵 정국으로 매우 시끄럽다. 그런데 어느 순간 사람들의 독기어린 눈빛 속에서 “어느 편이야?” 하는 질문이 들리는 것만 같다. 모든 선택은 우리 편이나 아니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어떠한 말을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편에게 하는 말이냐, 저 쪽 편에 하는 말이냐 하는 질문이 식별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교구장님이 얼마 전에 탄핵 관련하여 메시지를 발표하셨다. ‘우리의 적은 서로가 아니라, 우리 사이에 자리잡는 증오와 분노의 악습’이라는 내용이었고, 나는 그것이 너무나 당위적인 내용이라서 오히려 호소력이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온라인에서 ‘위급할 때 뭐하다가 상황이 안정되니 이제야 나타나서 숟가락을 얹느냐.’ ‘탄핵 반대 세력을 위로하려고 한 말에 불과하다.’ 등의 글들이 피드백으로 올라오는 것을 보면서, 그게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본인이 신부라는 어떤 분은 주교님들이 탄핵 이후 120여일 간 어떠한 메시지도 내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그동안 침묵했던 죄를 고백”해야 한댄다. 그 피드백들 사이에 숨어있는 ‘남의 편’에 대한 분노가 서슬퍼렇다는 느낌이 들었다.

흔히 아직도 빨갱이 운운하면서 우리 사회에 간첩과 공산당이 숨어서 활동한다고 믿는듯한 보수주의자들을 향해, 그들이 한국전쟁의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하곤 한다. 아직도 반공주의 이념에 따라 현대 사회 문제에 대응하려는 그들의 인식 수준이 전쟁 때 사용하던 문법이라고 비판하는 거다. 그러나 이 문제는 진보와 보수가 공유하는 문제다. 피아 식별이 가장 우선시 되는 상황은 전쟁 말고는 없다. 아직도 우리 정치 환경은 전시 상황과 같다. 이념이란 연속적 스펙트럼의 한 가운데에서 어딘가 자리를 점하는 것이라는 단순한 사실이 무시되고 있다.

우리 편이면 약자와 함께 하는 것이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며 저 쪽 편이면 기득권이고 그들 표현을 빌리자면, ‘WYD 개최를 위해 기득권에 아첨하고 몸사리는 것’이라고 하니, 소름이 돋는다. 그 공격적인 배타성이 두려울 정도다. 성탄 메시지, 신년 메시지, 사순 메시지에 거듭 탄핵 정국 관련하여 규탄하는 메시지가 실렸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이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 씁쓸하기도 하다.

한창 탄핵 정국 중 한남동에서 시위가 한창일 무렵, 꼰벤뚜알의 어느 신부께서 불을 밝혀 시위에 참여하던 자매님들에게 화장실을 개방하시는 모습이 찍인 사진이 뉴스에 실렸다. 신부께서 콘서트장에서 쓰던 응원봉(?)을 들고 가셨고, 뒤에 따르던 이들은 자매님들이었기에 당연히 진보 계열 시위자들을 응원하는 모습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진보 진영에서는 역시 신부는 다르다는 둥 천주교가 희망이라는 둥 열광했다. 그런데 해당 신부님께서 몇 일 뒤에 평화방송에 나와 말씀하시길, 그날 보도가 나간 이후 수도원에 항의 전화가 빗발쳤댄다. 빨갱이 신부, 정치 신부 운운하며 격한 표현을 쓰는 항의가 그야말로 빗발쳤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신부 말씀하시길 ‘억울하다. 사실 그 날 화장실은 진보 진영 뿐만 아니라 보수 쪽 시위자들에게도 다 개방했고, 심지어 경찰들에게도 다 열어줬다.’고 하시는 것 아닌가. 나는 그 이야기가 모든 것을 우리 편 니네 편으로 모든 사건을 해석하려는 우리네 경향을 잘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사람들은 눈에 후레시를 비추며 서로 묻는다. “넌 누구 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