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은 처음부터 괴물로 태어나지 않는다. 서서히 만들어지는 것이다. 가령, 유다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팔아먹을 생각으로 제자 공동체에 난입한 괴물이었을까? 아니었을 거다. 처음에는 사랑을 향한 갈망으로 벅차오르며 여느 제자와 다를 바 없는 바 없는 시작을 했을 거다. 하지만, 어쩌나. 우리의 삶은 수많은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돌아서면 다시 만나게 되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한번 두번 악을 선택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서서히 존재가 악으로 기운다. 정신 차렸을 때는 이미 돌아가기 어려운 길 한가운데에서 괴물이 된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거다.
예전에 어느 캠프에 갔을 때다. 그날 프로그램은 카누를 타고 호수 위에서 벌이는 물놀이였다. 시작부터 험난했다. 학생들은 배에 타는 것도 꺼려했고, 작은 물방울 하나라도 튀기면 기겁을 하며 항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거부감은 허물어지고, 웃고 떠들며 서로 물도 뿌려가며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물놀이를 끝내고 내려온 우리들에게 그날 지도 신부님은 뒤통수가 얼얼한 후속 설명을 덧붙여 주셨다. “여러분이 오늘 물에 젖어 들었던 모습이 바로 악에 젖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악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기 마련이지만, 악에 한두 번 노출되기 시작하면 점점 무뎌집니다. 서서히 큰 악을 저지르는 것도 마다하지 않게 되고, 급기야는 다른 사람까지 악에 끌고 들어가게 됩니다. 악은 그렇게 확장되어 가는 겁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누구나 설레는 마음으로 시작하기 마련이다.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부담감도 있었을 테지만, 아주 작은 긍정적인 피드백만으로도 가슴이 설레는 예민한 성취감으로 첫발을 내디뎠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일상에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부담감은 익숙함에 묻히고 예민했던 성취감은 반복되는 횟수에 퇴화된다. 빈자리는 사무적인 관료의식이 채워넣 을 수도 있고, 습관적인 무관심에서 비롯되는 권위주의가 채워 넣을 수도 있다. 첫 설렘으로 가득했던 뉴비는 그렇게 서서히 생동감을 잃고, 구태의연한 중진이 되고 마는 것이다.
〈더 메뉴〉에 등장하는 쉐프, 슬로윅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생동감을 잃은 삶이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삶이라고 느끼며 비참한 침통 속에 잠겨 있다. 그리고 그 생동감을 앗아간 주범은 ‘생각 없이 찬탄을 쏟아내는 비판 의식 없는 팬’ ‘돈으로 그 생동감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며 실상 그 뉴비의 열정을 백화점 서비스 제공 취급했던 자’ ‘무엇이든 비판하고 비평하려고 하며 고압적인 자세로 군림했던 평가자’ ‘아무 공감 없이 뉴비의 열정을 소비만 했던 생각 없는 소비자’ 등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각 그룹에서 대표적인 사람을 선발하여 격리된 섬에 위치한 자신의 레스토랑으로 초대한다. 이제,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삶을 사는 이의 분노가 이들과 함께 ‘옥쇄’하러 가는 죽음의 논개 작전이 시작되는 것이다.
아, 마치 팩에 든 우유를 빨아 먹듯 뉴비의 생동감을 빨아먹는 이들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어디서나 다 똑같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수동적으로 빨아먹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뉴비는 암묵적으로 자신의 생동감을 내어주는 주동적인 공범이다. 무작정 찬탄을 쏟아내는 ‘추종자’들의 찬사에 귀를 한 번 기울일 때, 자신의 열정을 백화점 서비스 취급하는 사람에게 서비스꾼처럼 허리를 조아리며 그들의 정당하지 않은 취향을 무조건 맞춰주려고 할 때, 고압적인 자세로 평가나 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평가에 굴복할 때, 그럴 때 자신의 열정을 스스로 상납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마음으로 한참을 살아오던 뉴비는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될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길까지 오고 나서야.
초대받지 않았는데 의도치 않게 그 섬에 발을 들이게 됐던 주인공 밀스는 여러 과정을 거치다 문득 알게 된다. 이 쉐프의 광기는 뉴비로서 누리던 첫 설렘을 잃은 상실감에 따른 발버둥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녀는 이제 죽어야 하는 마지막 순간에 쉐프에게 ‘치즈버거’를 요구한다. 쉐프가 요리사로서 처음 요리했던 그 요리. 만들면서도 학생으로서 연습만 하던 요리를 진짜 요리사로서 직접 만들 수 있다는 기쁨에 웃음이 지어지던 그 요리. 요리를 곧 맛볼 고객들을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지어지며 더 큰 설렘으로 집중할 수 있게 해줬던 그 요리. 이윽고 자신의 요리를 맛보는 고객이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기뻤던 그 요리. 너무 맛있다며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는 고객들의 반응에 더욱 큰 열정으로 다음 조리를 기다리게 했던 그 요리. 그게 바로 ‘치즈버거’였다. 결국, 죽음의 파티에서 그것을 알아봤던 그녀만 살아서 나가게 되었다는 설정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이제 알게 된다. 처음이라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누구나 처음 시작하는 뉴비의 단계는 금방 벗어나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처음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내 마음속에서 숨 쉬던 열정과 생동감이었다. 어제도 했었고 내일도 해야 하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의미 있는 일이라는 자각 속에서 이루어지는 생동감. 그것을 잃으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고 죽은 것이나 다름없게 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자서전에서 이런 말을 했다. ‘가난을 말하려면 가난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실제로 가난하지 않으면서 가난에 대해 말하면, 현실과 동떨어진 이론가나 맹목적인 근본주의자가 될 수 있다.’고 말이다. 생동감을 잃고 뒤로 물러서서, 꿈꿨던 삶을 실제로 사는 대신, 당위적인 목표만 매번 머릿속으로 그리기만 하고 입만 털면 이론가 혹은 근본주의자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것이, 유명 쉐프지만 사실은 쉐프로서 살지 못했던 슬로윅이 아닐까 싶었다.
아, 사실 영화가 다 우리 이야기, 내 이야기 같았다. 그래서 슬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