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보관물: 간이 일기

2025.4.30.

물론 나는 이빨 꽉 깨물고 동기 모임을 안 나가는 사람이라, 말할 자격이 있는가 고민이 되긴 하지만… 동기 모임에 안 나오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 동기 모임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돌아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로에게 힘이 되는 이야기로 활력을 불어넣는 대화를 창출해 낼 능력을 상실한 것은 아닌지 자정적 성찰을 해야 한다는 거다. 그러나 안 나오는 사람은 계속 안 나온다는 문제의식 앞에서, 안 나오는 사람을 문제시하는 경우가 있어 슬퍼질 때가 있다. 동기 모임에 안 나오는 신부는 사제적 삶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는 둥, 꼭 동기 모임 안 나오는 사람이 결국 사고 치고 나가더라는 둥. 타인을 죄악시하며, 결함이 있는 사람으로 몰면, 진단도 간단하고 대처 방안도 명쾌해진다. 내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것이니까. 그러나 문제 원인을 밖에서 찾으려고 하면, 조직은 새로운 변화를 맞이할 가능성을 놓치게 된다.

갈수록 보수화되는 청년 세대를 바라보며, 청년들이 문제고 청년들에게 어떤 결함이 있는 것이라 손가락질하는 기성세대의 완고함이 그 안에서 보이는 것만 같다. 교황님 자서전 마지막에 이런 말이 나온다. “요즘 젊은 세대가 종교와 거리감을 느낀다고 한다면, 우리는 세속화를 탓하기보다 우리 삶이 보여 준 증거에 대해 깊이 돌아봐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바로 그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현대의 도전을 이해하며, 대화에 열린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합니다. 두려움에 갇혀서는 안 됩니다. …. 모두 밖으로, 자신들의 안전지대를 벗어난 것입니다. 이처럼 열린 마음에서만 진정한 조화가 피어날 수 있습니다.”

교황님이 다시금 엄청나게 개방된 분이었다는 것을 감탄하며, 다시금 우리네들의 모습을 돌이켜 본다. 왜 성당에 청년이 없는가. 그런 질문 앞에서 우리는 ‘청년들이 바빠서. 청년들이 종교 생활에 관심이 없어서. 청년들이 세속화되어서.’ 등등등 청년들의 문제점을 찾기 바빴던 것은 아닌가. 하지만 문제는 항상 나였다는 것.

2025.4.25.

이탈리아에서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이주민 2세대인 프란치스코 교황님. 이주민으로서 정체성이 분명하셨다던 교황님의 이야기가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생각을 이어가다보니, 문득 어린 시절 보았던 만화 〈엄마 찾아 삼만리〉가 생각난다.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가정 형편이 어려워져 아르헨티나에 돈 벌러 떠났던 엄마를 찾아가는 소년의 이야기였다. 아무리 지켜봐도 간발의 차이로 엄마를 만나지 못하고 좌절하는 소년의 이야기가 어린 시절이었는데도 마음 아팠던 기억이 난다. 저러다 끝내 못 만나고 만화가 영영 끝나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는데, 기어코 엄마와 감격의 포옹을 하며 마무리됐던 기억도 난다.

이제보니 바로 저 소년이, 교황님 세대였구나… 싶다. 제노바에서 출발해서 스페인을 찍고 아프리카 어딘가를 경유해서 브라질에 도착하여 배를 갈아타고 한참을 가야 도착하는 멀고 먼 아르헨티나까지, 제노바에서 밀려난 ‘주변인’들의 노곤한 삶. 그것이 이민자들의 삶이었겠지.

그리하여 소외된 이들에게 교회의 문을 열어야 한다고 외치는 교황이 준비된 것이겠지. 하느님의 섭리란 놀랍다는 생각을 다시금 한다. 〈엄마 찾아 삼만리〉나 다시 한 번 볼까.

2025.4.17.

부활 선물로 받은 《마리아는 길을 떠나》라는 책을 살펴보고 있다. 아직 리뷰 쓸 그런 수준은 아니지만, 흥미로운 숫자 조합이 눈길을 끌기에, 기록을 남겨놓고자 한다.

7 – 수태 예고를 전하는 루카복음의 대목에는 지명, 이름 등을 표현하는 고유 명사가 총 7개 등장한다. 가장 완성된 형태를 표현하는 의도적인 배치란다.

365 – 성경 전체에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뜻을 담은 각종 표현이 365회 등장한단다. 매일 주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이라고 이해된댄다.

신학적으로 유의미한 숫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생각해 보지 못한 흥미로운 의미부여다.

2025.4.11.

몇 일 전에 교구장님 탄핵 메시지에 관련된 글을 하나 올렸는데, 몇몇 피드백을 받았다. 첫 번째는 한국전쟁 때 피아식별을 해야만 했던 아픔은 그야말로 적과 아군의 식별 문제였는데, 이번 탄핵 정국은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에 더 가까웠기 때문에 비유가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었다. 사실 이번 정국을 ‘옳다, 그르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양심적 선택의 문제로 보지 않는 것 자체가 한 쪽 편을 들어주는 모양새가 된다는 이야기와도 맥이 닿는 지적이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교회가 여전히 제 몫을 할 수 있다고 믿고 기대하기에, 더 많은 것을 희망하며 하는 소리라고 이해해 달라는 겸손한 첨언이 더욱 마음을 쓰라리게 했다. 차라리 분노에 차 있는 호통이었으면, 속으로 정신승리라도 했을텐데.

정의를 갈구하는 거룩한 분노와 정화되지 못한 개인적 공허함에서 비롯되는 감정적 대응에 가까운 분노.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이 개인 내면에서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라는 사실은 여전하다. 정국이 어느 정도 해소됐으니, 내적 문제에 근본적인 숙제를 안고 사는 우리라는 것을 되새기자고 호소였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공동체적 문제에 대한 충분한 예언자적 소명의 실현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다시금 마음이 아파진다. ㅠㅜ

2025.4.9.

여의도에 벚꽃이 만개했다. 지난 주 금요일까지만 해도 조금 모자란듯한 느낌이 있었다고 했는데. 이 개화가 기준점이자 척도가 되어 시간이 흘러간다는 것이 비로소 실감난다. 매일 퇴근만을 목표로 하루하루를 보냈더니 딱히 한 것도 없는데 벌써 여기까지 와부럿다. 진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삶의 목표였나 싶은 반성이 든다. ‘목적이 이끄는 삶’ 뭐, 그런 책이라도 다시 읽어봐야 하나 싶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