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20여 년 전 일이 되었다. 어느 수녀원에서 진행된 모임에 갔다. 3월에 첫 시작을 내딛는 일정으로 나에게는 매우 중요한 모임이었다. 모임이 시작하기도 전 거의 한 시간 전에 도착하였고, 나 혼자였기에 자유롭게 어디에 앉을지 고민할 수 있었다. 몇 가지 기준을 만들어놓고 고민을 시작했다. 맨 앞줄은 너무 나대는 것 같으니까 제외. 너무 가운데는 진행하시는 분과 눈 마주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므로 부담스러운 만큼 제외. 너무 뒷줄은 소극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으므로 제외. 창가보다는 으슥한 벽 쪽이 좋겠다는 식의 생각을 몇 차례 이어간 끝에 가장 적합한 것으로 보이는 자리를 찾아, 앉고자 다가갔다. 그런데 앉으려고 보니 눈에 보이는 각도가 어쩐지 익숙했다. 마치 데자뷔처럼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시야각이었다. 그 순간 ‘앗!’ 싶은 탄성이 절로 나왔다. 작년에도 해당 모임에 참석했었는데, 그때도 한 시간 전에 미리 도착하여, 좌석들을 바라보며 똑같은 기준에 따라 똑같은 고민을 하고, 결국 똑같은 좌석을 선택하여 그 자리에 앉았던 과거가 떠올랐다.
매번 선택할 때마다 처음 해보는 새로운 선택인 것 같고, 새로운 선택을 내릴 때마다 한 번도 내디뎌보지 못한 미지의 영역을 향해 새로운 삶을 열어나간다는 생각을 하곤 하지만, 그것이 착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매번 내 한계에 갇혀 같은 선택만 반복하면서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었다. 넷플릭스에서 봤던 어느 드라마가 떠오른다. 〈O2〉였나. 주인공은 사실 뇌 기억의 전체가 컴퓨터에 옮겨진 상태다. 특정 구간의 삶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주인공은 이번이 수천 번째인지 수만 번째인지 헤아려볼 기회조차 없이, 이번 삶이 첫 번째 삶이라 생각하고 나아간다. 내리는 선택은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매번 똑같은 선택이다. 자유롭게 고민하고 사고하여,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굳건히 믿고 있겠지만, 주인공의 선택은 매번 똑같다.
인간이 창조주에게 받은 가장 큰 선물 중 하나가 자유의지라고 고백하지만, 자유의지 또한 마치 양심처럼 방치해두면 감각이 무뎌지기 마련이다. 만나는 사람의 면면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며, 봉직하고 있는 직무는 달라질 수 있겠으나, 결국 달라진 것 없는 한계 안에서 똑같은 선택을 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삶이야말로 죽은 삶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궁극적 목표가 또 다른 자아,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라면, 선택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내면이 치유되고 화해가 이루어지며, 온화함으로 채워질수록, 자유의지가 더욱 날카롭게 벼려지는 것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