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중에 산중에 있는 마을은 한밤중에 방 안에 들어오는 군인들이 가장 공포스러웠다고 한다. 그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눈에 후레시를 직접 비추어 그들을 알아보지 못하게 한 후 묻는다. “어느 편이야?”
이 질문에 잘못 대답하면 온가족이 몰살 당한다. 국군에게 ‘공산당 편이에요.’라고 해서는 안되는 것이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념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산중의 가난한 민중에게 목숨을 건 선택은 너무 가혹하다. 그렇다고 “우리는 그런 거 잘 몰라요. 어느 편도 아니에요.” 하는 식의 영구중립 선언은 통하지 않는다.
오로지 50% 확률로 온가족의 목숨을 거는 러시안 룰렛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매일밤 벌어진다. 아군에 설 것인지 적군이 될 것인지 선택을 강요하는 폭력이 한국전쟁의 핵심이다. 한국전쟁이 그 당시를 살던 온국민의 무의식에 트라우마로 박아넣은 병폐다. 이념이란 스펙트럼 같은 것이어서 수많은 중간치를 갖기 마련인 것이나, 어느새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전쟁 현장의 재현이 되었다.
요즘 탄핵 정국으로 매우 시끄럽다. 그런데 어느 순간 사람들의 독기어린 눈빛 속에서 “어느 편이야?” 하는 질문이 들리는 것만 같다. 모든 선택은 우리 편이나 아니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어떠한 말을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편에게 하는 말이냐, 저 쪽 편에 하는 말이냐 하는 질문이 식별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교구장님이 얼마 전에 탄핵 관련하여 메시지를 발표하셨다. ‘우리의 적은 서로가 아니라, 우리 사이에 자리잡는 증오와 분노의 악습’이라는 내용이었고, 나는 그것이 너무나 당위적인 내용이라서 오히려 호소력이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온라인에서 ‘위급할 때 뭐하다가 상황이 안정되니 이제야 나타나서 숟가락을 얹느냐.’ ‘탄핵 반대 세력을 위로하려고 한 말에 불과하다.’ 등의 글들이 피드백으로 올라오는 것을 보면서, 그게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본인이 신부라는 어떤 분은 주교님들이 탄핵 이후 120여일 간 어떠한 메시지도 내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그동안 침묵했던 죄를 고백”해야 한댄다. 그 피드백들 사이에 숨어있는 ‘남의 편’에 대한 분노가 서슬퍼렇다는 느낌이 들었다.
흔히 아직도 빨갱이 운운하면서 우리 사회에 간첩과 공산당이 숨어서 활동한다고 믿는듯한 보수주의자들을 향해, 그들이 한국전쟁의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하곤 한다. 아직도 반공주의 이념에 따라 현대 사회 문제에 대응하려는 그들의 인식 수준이 전쟁 때 사용하던 문법이라고 비판하는 거다. 그러나 이 문제는 진보와 보수가 공유하는 문제다. 피아 식별이 가장 우선시 되는 상황은 전쟁 말고는 없다. 아직도 우리 정치 환경은 전시 상황과 같다. 이념이란 연속적 스펙트럼의 한 가운데에서 어딘가 자리를 점하는 것이라는 단순한 사실이 무시되고 있다.
우리 편이면 약자와 함께 하는 것이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며 저 쪽 편이면 기득권이고 그들 표현을 빌리자면, ‘WYD 개최를 위해 기득권에 아첨하고 몸사리는 것’이라고 하니, 소름이 돋는다. 그 공격적인 배타성이 두려울 정도다. 성탄 메시지, 신년 메시지, 사순 메시지에 거듭 탄핵 정국 관련하여 규탄하는 메시지가 실렸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이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 씁쓸하기도 하다.
한창 탄핵 정국 중 한남동에서 시위가 한창일 무렵, 꼰벤뚜알의 어느 신부께서 불을 밝혀 시위에 참여하던 자매님들에게 화장실을 개방하시는 모습이 찍인 사진이 뉴스에 실렸다. 신부께서 콘서트장에서 쓰던 응원봉(?)을 들고 가셨고, 뒤에 따르던 이들은 자매님들이었기에 당연히 진보 계열 시위자들을 응원하는 모습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진보 진영에서는 역시 신부는 다르다는 둥 천주교가 희망이라는 둥 열광했다. 그런데 해당 신부님께서 몇 일 뒤에 평화방송에 나와 말씀하시길, 그날 보도가 나간 이후 수도원에 항의 전화가 빗발쳤댄다. 빨갱이 신부, 정치 신부 운운하며 격한 표현을 쓰는 항의가 그야말로 빗발쳤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신부 말씀하시길 ‘억울하다. 사실 그 날 화장실은 진보 진영 뿐만 아니라 보수 쪽 시위자들에게도 다 개방했고, 심지어 경찰들에게도 다 열어줬다.’고 하시는 것 아닌가. 나는 그 이야기가 모든 것을 우리 편 니네 편으로 모든 사건을 해석하려는 우리네 경향을 잘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사람들은 눈에 후레시를 비추며 서로 묻는다. “넌 누구 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