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5.19.

영화 〈콘스탄틴〉을 보면 가브리엘 천사가 음모를 꾸미는 장면이 나온다. 주님을 배신했다고 소리치는 주인공에게 가브리엘이 말한다. ‘너희 인간은 특별한 존재야. 그 어떤 죄를 지어도 다시 돌아올 기회를 허락받지. 이 우주에 그런 은총을 허락받은 존재는 또 어디에도 없어. 그런데 너희는 주님을 찾지 않아. 다만, 공포에 질리면 그 어느 때보다도 주님을 찾지. 자, 이제 내가 너희에게 주님을 간절히 찾을 수 있도록 공포를 선사하지.” 이러면서 사탄의 아들을 이 세상에 불러내려는 계획을 수행하려고 한다. 주님을 위해, 가장 주님께서 선택하지 않을 선택지를 선택한 셈이다.

가장 위기에 몰렸을 때, 가장 간절할 때 하느님을 찾는 본능적인 나약함이 인간의 본성에 아로새겨져 있다. 소설 〈침묵〉에는 그 나약함이 기치지로라는 한 인간을 통해 표현된다. 구역질이 날 만큼 간사하게 손바닥을 비비며 간교한 웃음을 짓길 주저하지 않는 나약한 인간이 기치지로다. 배교하고 몇 번에 걸쳐 성직자를 팔아먹고 공동체를 배신하는 행위가 ‘살고 싶다.’는 간절함을 이기지 못하고 마구 튀어나온다.

하지만 이 나약함은 하느님을 찾는, 신을 향한 갈망을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숨기고 있다. 어떤 공포 속에서도 이 갈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소설 안에, 죽음을 무릅쓰고 일본에 밀입국한 성직자들을 발견한 신자들이 반가움을 표하는 장면이 나온다. 죽을 위기 속에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은 신자와 신부의 만남이다. 이 만남 안에서 하느님을 향한 본능적 갈망이 느껴진다. 오랫동안 잃었다고 생각한 눈물이 ㅠㅜ

“누군가가 횃불을 내밀자 조그마한 노인의 추한 얼굴이 그 불빛 속에 검붉게 떠오르고, 그 주위에 대여섯 명의 젊은 사나이들이 어쩔 줄 몰라 하는 눈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파드레, 파드레.” 노인이 십자성호를 그으면서 중얼대는 그 소리에는 우리들을 위로하는 부드러움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파드레(신부님)’라는 그리운 포르투갈 말을 여기서 듣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물론 노인은 그 이외의 포르투갈 말을 알고 있을 턱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공통적 표식인 십자성호를 긋는 눈앞에서 우리도 십자성호를 그어 보임으로써 대화는 충분했습니다. 그들은 일본인 신자였습니다.”

예전에 주님은 악을 도구로 쓰지 않으신다는 이야기를 강론 중에 했다가, 한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여전히 그렇다고 생각한다. 〈콘스탄틴〉의 가브리엘의 선택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하느님은 악으로도 선을 이루신다는 것은 분명하다. 신앙 때문에 목숨을 잃는 악한 상황. 현실이 지극히 악하기 때문에, 하느님을 찾는 선이 빛을 발한다. 선이 얼마나 위대한지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인간은 이렇게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나도 푸릅니다.”

人間こんなに哀しいのに 主よ 海があまりに碧い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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