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들이 동굴 밖으로 나오는 것은 가능한가? 소설 〈표백〉

20년도 훨씬 더 된 일이지만 기억에 뚜렷이 각인된 질문 중, 소설 수업 중에 현대소설 강의하시던 선생님께서 던지셨던 질문이 떠오른다. “자본주의의 논리에서 완전히 벗어난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한가? 동굴 속에 들어가서 원시적 삶으로 회귀하는 선택 말고, 이미 사회 안에 부속처럼 맞물려 살아가는 일개 개인이 자본주의의 논리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가능한가. 결국 자본주의를 비판한다고 하더라도, 그 구조에서 탈피한다는 것은 이상향에 불과한 것 아닌가. 그대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이런 내용의 질문이었다.

그 질문의 의미가 무엇인지조차 깨닫지 못했던 어린 나로선 답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구조적인 모순이 가득한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목소리는 오랜 시간 단절 없이 이어져 왔다. 심지어 종교적 관점에서 기성 사회에 대항한 반란도 많았다. 묘청의 난이랄지, 아니면 궁예의 첫 시작도 사회 모순을 종교적 이상으로 개혁하려던 열망에 있었던 것 아닌가.

그러나 인간의 역사를 통틀어 기존 구조에서 벗어나서 완전히 새로운 체제를 제시했던 사례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다. 아무리 모순 속에서 고통받는다 하더라도, 내가 발 딛고 있는 땅바닥을 없애버리는 개혁을 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기존 체제의 고리 안에서 크기만 다른 갖가지 파장 몇 개를 불러일으키며 모순의 정도를 완화하는 것이 우리네 개혁의 발걸음일지도 모르겠다.

어느덧 2025년이 되었다. 이 시대의 키워드는 청년이라고 생각한다. 결혼 거부, 출산율 급락이라는 표면적인 현상 밑에 깔려있는 청년들의 깊은 좌절감을 알아보지 못하고, 기성세대는 ‘결혼이 얼마나 기쁜가~’를 부르짖으며 혼자 살 것을 독려하는 티비 프로그램을 단속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다. 남녀 갈등이 청년 세대에서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되는 것도 결국 청년들의 좌절감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터지기 일보 직전의 불만이 터져나갈 곳을 찾지 못하고 내부 총질로 번져가는 현상이 젠더 갈등의 본질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소설 〈표백〉은 2011년도에 발표된 소설인데도, 역시 시대를 앞서 바라보는 예술의 결정체답게, 이 시대를 너무나도 잘 표상한다. 청년들의 좌절감이 아무리 깊어진다고 한들, 청년들이 이 사회의 모순적 구조 안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살아간다는 것이 가능한가.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성찰 앞에서 소설은 시작한다. 결국 이 사회를 돌리는 또 하나의 부속으로서 생생한 젊음이 내뿜는 에너지를 차출당하고, 언젠가 늙어서 또 다른 청년 세대가 올라오면 정리해고니, 은퇴니 하는 말로 퇴물 취급당하는 것이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눈앞에 두고 사는 뻔한 운명인데, 특히나 이 시대의 청년들은 부속으로 사는 것조차 힘겹다.

이 사회를 부숴버리고 싶다는 항의 어린 반란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소설 〈표백〉은 답한다. 그것조차 불가능하기에 결국 자기 자신을 부숴버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말이다. 그렇기에 자기 파괴라는 슬픈 자조가 소설 내내 과격한 설정을 통해 이어진다. 멀쩡했던 청년들이 사회적 성공이라고 불릴 수 있을 만한 자리에 아득바득 올라간 후, 날짜를 맞춰 차례로 자살해 버린다는 설정. 그 격정적인 설정을 통해, 우리 사회의 답답한 현재와 미래가 엿보인다.

20~30년 전에, 우리가 아직 경제적 역동성이 남아있을 시절, 이미 그러한 생동감을 잃어버린 일본을 바라보며, 일본인들은 서로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봤었다. 그러면서 그 현상은 결국 일본 사회가 극단적으로 폐쇄적이면서 동시에 정적인 사회가 되었다는 증거와 같다는 진단을 내렸었다. 움직임도 없는데 외부를 향해 열려있지도 않은 사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고요히 살기 위해, ‘민폐’를 끼치지 않고 내 바운더리 밖으로 나오지 말 것을 사회가 강요하고 있다는 진단이었다. 

놀랍도록 한국 사회가 가고 있는 길과 비슷하다. 이미 우리 사회가 ‘민폐’에 예민해지고 있다. 물론 공중도덕에 대한 감각이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허허~ 웃고 지나갈 수 있을 만큼 경제적 여유, 심리적 여유, 사회적 여유가 고갈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여유가 사라진 자리를 각 개인에 대한 사회의 암묵적 통제와 제재가 채워나가고 있다.

그 답답한 사회를 평생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이제야 직면하게 된 청년들의 한탄이 심상치 않다. 청년들의 자기 파괴 말고 우리가 줄 수 있는 답이 과연 있기나 하느냐는 소설 〈표백〉의 호통이 15년이나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이 처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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