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님 자서전 〈희망〉

악을 선으로 이루시는 하느님

70~80년대 우리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군부독재가 판쳤던 동시대 아르헨티나에서, 불의가 선명해지면서 반대급부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의 대상 또한 분명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명백한 독재가 횡횡하게 되면, 시대적인 선택은 진보, 보수 등의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 사이에서 그 어느 지점을 고르는 ‘정치적 성향의 선택’에 머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전기를 보면서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희망〉이라는 제목의 전기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그분의 삶의 발자취를 이해할 수 있는 첫 번째 코드가 그분이 살아온 아르헨티나의 시대적 배경은 ‘정의냐 불의냐 사이의 선택’을 요구하는 시련 그 자체였다는 점이다. 사랑하는 친구들이 정의를 선택했다는 이유로 납치되어 산 채로 비행기에서 떨어져 죽고 시신으로 바닷가에서 발견되는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라면, 선택지가 둘 중 하나임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침묵이냐, 정의냐.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그런 상황에서 정의를 선택하는 것이 곧 복음을 증거하는 것임을 절절하게 체험하셨던 분이다. 그런 분에게 진보, 보수 사이에서 중립을 요구하며 노란 리본을 뗄 것을 요구하는 말은 얼마나 위선적으로 들렸을까.

그러나 그분이 세상을 바꾸는 것은 정의 그 자체가 아니라고 고백하는 대목은 그분을 보통의 사회운동가와 근본적으로 구분되게끔 이끈다.‘세상 모든 문제가 정의만으로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특히 악의 물결을 멈춰야 할 때는 누군가가 자신의 의무를 넘어서는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93쪽) 구조적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단초는 사랑에 있다. 사랑은 개인 간에 나누는 감정과 동일시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개개인 간의 감정이 어떻게 사회 전체를 넘나드는 파형을 이룰 것인가 하는 의문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인간을 향한 애정이 근본적인 치료제라는 것을 그분은 보여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책에서 몇 차례 등장한 페론주의에 대한 비판은 의미심장하다. 페론주의가 처음 발표될 때, 대통령은 해당 정책이 가톨릭 사회교리에 위배되지 않는지 지역 교회 주교에게 확인까지 했다. 그러나 왜 페론주의는 결과적으로 아르헨티나를 절벽으로 밀어 넣었는가. 그것은 정답이 불의한 구조 그 자체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애정에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가난을 바라보며 문제점을 분석하는 대신 가난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일 것이다. “가난한 이들과 직접 함께 살며 체험하지 않고서는 가난을 말할 수 없다. 이런 직접적인 체험이 없다면 우리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론가나 맹목적인 근본주의자가 될 위험이 있다.” (240쪽) 이 구절이 페론주의와 관련되어 나온 말은 아니지만, 교황님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설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느님은 악을 선으로 이루시는 분이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마찬가지였다. 교황님은 가난 때문에 이탈리아에서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이탈리아 이민 2세대이신데, 책 머리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아르헨티나 이민을 위해 배를 가득 채운 이주민들을 태우고 항해를 하던 중, 배가 침몰하여 거의 전원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는데, 사실 교황님의 부모님이 해당 배의 승선 티켓을 구입하셨다는 것이다. 재산 매각이 늦어지면서 다른 배를 타게 되었는데, 사실 교황님은 태어나지도 못할 수 있었던 셈이다. 교황님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정체성은 ‘이주민’이자 ‘변방으로 밀려난 주변인’이라는 것을 가장 명징하게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하겠다. 

어쩌면,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선택한 것은 이탈리아 추기경단의 마지막 곤조였을지도 모르겠다. 유럽 밖에서 교황을 뽑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렸지만, 이탈리아인만큼은 마지막까지 포기 못 했던 미련 말이다. 그러나 그런 인간적 한계 안에서 하느님은 오히려 ‘이주민’이자 ‘주변인’으로서 인간을 깊이 사랑하는 교황이 람페두사를 방문하고 노란 리본을 매게끔 이끄셨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계획을 뛰어넘는 성령의 활동 아닐까.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같은 시대를 살았음에 깊이 감사드린다.  어른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이 또 한 분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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